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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7.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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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6. 19. 15:34

뒤를 바라보던 것이 옆에 나란히 서고 싶어졌고, 너른 품에 안기던 것이 그 어깨를 감싸주고 싶어졌다. 그게 단순한 경애가 아님을 깨달은 것은 이미 머리가 말랑한 시기를 지나친 직후부터였다. 광활한 사막 너머를 응시하던 아누비스가 머리를 세차게 털었다. 복잡한 생각이 떨어져 나갈리는 만무했으나 그저 어릴 적부터 이어진 습관이었다. 아마 아버지로부터 들어버릇 했으리라. 언제나 그의 그늘을 벗어나지 않았으니까. 분명 이것도 그로부터 떨어져 나온 기억의 잔재와도 같을 것이었다.

머리를 흔든 탓에 시야가 잠깐 흐릿했으나 눈앞의 사막은 움직이지 않은 채였다. 숨 쉬지 않는 풍경이 어색했다. 아버지의 몸과도 같은 사막은 그 고동을 멈추지 않았었다. 그것을 한껏 들이마시면 마치 아비의 체취와 마주하는 기분이 들어 아누비스는 모래가 걸려 켁켁대면서도 들이마신 일이 많았다. 적어도 자신의 의지로 두아트를 건너기 전까지는 그것도 습관 중 하나로 존재했다.

손에 무기를 쥘 수 없고, 드넓은 사막을 횡단하지 못하는 전쟁과 사막의 신이 과연 그 자체로 살아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가? 조금 너그러이 그렇다고 한다면 본인의 아버지는 살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본인의 아버지는 죽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몸이 살아 있다고 한들 조카에게 최고신 자리를 뺏기고 처박혀버린 전쟁의 신은 차라리 죽은 자 취급을 택했다. 따라서 자신은 죽은 아버지를 위해 이 사막을 수호하는 중이었으나 이를 실행해야겠다는 생각엔 예나 지금이나 한 치 의심도 없었다.

나는 용서받을 수 있을까?

전쟁의 신은 모든 엔네아드와 온 이집트를 혼란과 마주시켰고 그러한 폭군과 독재자는 언젠가는 끌어 내려져야 하는 존재였다. 왕관의 마지막 세습을 원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따라서 자신의 아버지도 내려오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었고 그를 위해서는 자신이 돌아서야 했다. 그러나 한 톨의 다정함도 없던, 투박하고 단단하기만 한 그 손을 뿌리치는 것이 이토록 괴로운 일이었을 줄은. 그렇다한들 배신당한 혈육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결국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를 죽인 것과 같았다.

아버지.

텁텁한 공기와 다를 것 없는 메마른 입술을 곱씹는다. 문지기 역을 자처한 뒤로 하루도 빠짐없이 바라보고 있었지만 오늘의 사막은 어쩐지 조금 더 서러웠다.

 

 

호루스 님. 안전합니다. 오늘도 고요하네요. 아누비스. 매번 수고가 많습니다. 말씀은 낮추셔도 된다고, 아닙니다. 이건 숙부님에 대한 나름의 예우이기도 하니 거절하지 말아주세요.

.... 이미 당사자가 죽음을 자처한 마당에 무슨 예우인 걸까. 말은 아껴두었다. 아누비스는 작당모의를 할 가능성이 염려되어 세트와의 접촉이 금지되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검을 겨눈 건 자신이었는데. 굳이 그 명령을 어기려고 시도한 적조차 없었으나 높으신 분들의 결정은 가끔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직 용서도 빌지 못 했는데...

아누비스?”

뇌리에 떠올랐다고만 생각했는데 저도 모르게 육성으로 낸 모양이었다. 아누비스가 입을 황급히 다물었다.

“...숙부님을 만나고 싶습니까?”

부디 잊어 주세요. 다른 신들께서 언짢아하실 겁니다.”

가끔 잊으시나 봅니다. 결정권은 저한테 있습니다.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곤란함에 이리저리 방황하던 시선이 또르르 굴러 왕을 바라보았다. ...닮았다. 지위에 도전할 정당성을 찾기 위한 불온한 생각 따위가 아니었다. 다만 오시리스를 닮은 그 얼굴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자신에게도 보였기 때문에, 그랬기 때문에 자신은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는가 하는 생각이 간헐적으로 들 뿐이었다. 왕은 언제나 자신보다 큰 상태였지만 세트가 패배한 직후부터 빠르게 성장한 아누비스는 더 이상 그를 올려다 볼 필요가 없었다. 이로써 더 닮게 되었을까? 아버지는 과연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어떤 식으로 경멸하실까? 분명히 가장 사랑했기에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을 떠올리는데도 온 몸이 죄어오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잘 계신가요?”

따라오세요. 시간을 많이 줄 순 없지만 직접 얘기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발을 떼기도 전에 심장이 요동쳤다. 드디어 만날 수 있었다.

 

 

저는 듣지도, 보지도 않겠습니다. 어차피 숙부님이 날뛰어도 제 쪽에서 제압할 수 있으니까요.”

“...감사합니다.”

왕은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아 제 길로 향했다. 백방으로 호전적인 전 최고신과 그의 아들을 단 둘이 있게 하면서 어떠한 감시도 제지도 하지 않는다. 진짜로 감시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으나 아무도 타박할 수 없다. 절대적인 초월자만이 가능한 태도리라. 어쩐지 아랫배부터 열기가 밀려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이상하게도, 아누비스는 처음으로 제 아버지가 어째서 저 올곧음을 어떻게든 꺾어버리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보지 못 할 대상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그가 걸음을 옮겼다. 신력을 원천 차단한다는 특수한 감옥탑은 최고신과 그가 허락한 자만이 출입할 수 있었으며 오직 세트를 가둬두기 위해 지었다고 했다. 단순히 날뛰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면 차라리 죽여 없앤 후 부활하지 못하게 막는 쪽이 편할 텐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번거로운 짓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최고신은 결코 그 위치가 가볍지 않았다. 경우가 특수하다고는 해도 단적으로 말하면 추락한 죄인일 뿐인 아버지를 이렇게까지 특별하게 대우할 이유는 없었다.

“...”

그러나 역시 괜한 의혹은 품지 않는 것이 좋다. 그가 또다시 머리를 털었다. 사라지지 않는 감정은 여태껏 그래왔듯 눌러 담으면 그만이었다. 발걸음마다 메아리가 울릴 정도로 넓은 홀의 정중앙에는 천장까지 솟아오른 철창이 있었다. 마치 거대한 새장으로도 보이는 이 무결의 감옥 중심에 그 사람이 있었다.

팔과 다리는 여즉 그 단단함을 잃지 않고 있어 아누비스는 내심 안도했다. 높은 천장에서 내리는 얄팍한 빛이 마치 백발처럼 보이게 하는 머리칼도 마지막으로 본 모습과 그대로 피부를 덮고 있었다. 날카로운 검을 품은 눈빛도 꺾이지 않았으리라. 광휘는 사라졌을지언정 그 무엇도 당신을 깎아내리지 못하였군요.

“...아버지.”

뭐야. 아누비스냐? 별일이 다 있다. 그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이 나를 만나도 된다고 하든?”

호루스님께서 잠깐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 또라이 새끼. 그래서, 손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아비를 밖에서 지켜보는 기분이 어떠냐? 계획대로 되어 아주 짜릿하냐?”

아버지 그런 게 아닙

나처럼 되기는 불가능할 것 같아 이 아비를 끌어내리는 쪽을 선택한 거냐? 그렇다면 네놈 치고는 머리를 꽤 썼구나. 결국 원하던 대로 됐으니 말이야. 다신 없을 기회일지도 모르는데 이 참에 실컷 내려다보고 가거라. 너 한 놈이 더 비웃는다고 해도 특별히 기분이 더러울 것도 없으니.”

아버지!”

표정이 제법 살벌하구나. , 착하게 타이르러 왔는데 이 아버지가 바닥으로 추락한 주제에 생각보다 꺾이지 않았어?”

그만하세요.”

처음으로 마주친 눈동자의 날이 시렸다. 새빨간 시선은 이젠 당신의 광휘가 닿지 않는 사막까지도 불태워버릴 것 같았다. 노골적으로 불쾌함이 어린 홍옥이 서서히 가늘어졌다.

방금 그 태도엔 책임을 질 수 있어서 지껄인 거겠지.”

왜 저를 내치셨습니까?”

안 본 사이에 많이 용감해졌구나. 옛날엔 대체 어디에 써먹어야 하나 했는데. 그래, 어디 한 번 이어봐라.”

,”

기십의 세월 속에서 뭉쳐진 감정을 차마 하나씩 꺼낼 수 없었다. 그런 섬세한 일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할 수 있을 리 없다. 조그만 틈바구니에서 비집고 나온 마음이 쏟아져 나왔다. 그가 얼굴을 감쌌다. 머리에 가득 찬 애정이 너무 무거워 고개를 드는 게 불가능했다.

전 아버지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더러워질 수 있었어요. 모두가 당신을 죽이라고 명령해도 저만은 오직 당신을 위해 죽을 수 있었어요. 피로 얼룩진 그 손을 제가 닦아드릴 수 있었어요. 왜 저를 버리셨어요! 올려다볼 수도 없게 높아진 아버지를 끌어내리면 그땐 마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왜 아버진 끝까지 저를 내치시나요. 제가 한참 부족하고 아버지의 눈에 차지 않았을 거라는 건 알아요. 그래도 저도.. 저도 사랑받고 싶었어요... 아버지의 옆에 나란히 서고 싶었다구요.”

전신이 화끈거렸다. 간헐적으로 훌쩍거리는 소리 외에는 그 어떤 소음도 없었지만 귀에서는 온 세상이 쿵쿵거렸다. 한참동안 둘 사이에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다가 문득 볼에 차가운 손가락이 닿았다. 고개를 들어 본 시선의 끝에 보기 드물게 복잡한 얼굴을 한 아버지가 있었다. 놓칠세라 아누비스가 그를 똑바로 응시했으나 시야가 일렁이는 탓에 뜻대로 잘 보이지 않았다. 눈가를 대신 쓸어내린 손가락을 따라 얼굴이 차츰 서늘해졌다.

나 참.. 그 유전자에 대대로 저주라도 받은 건지 원.”

아버지?”

왜 네놈이 빌어먹을 매새끼랑 닮았는지 단 한 번도 궁금한 적이 없었던 거냐? 용기만 없는 줄 알았더니 통찰력도 없구나.”

자신이 조금만 더 어렸더라면 그를 핑계로 이 말의 뜻을 이해하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아누비스가 여태 축축한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이상했다. 꿈에서마저 바라던 옛날의 아버지의 모습인데도, 자꾸 이 모든 걸 없던 일로 하고 싶었다. 고동소리마저 들릴 것 같아 가슴을 몇 번 때렸으나 그에 자극이라도 받은 것처럼 심장은 더 거세게 뛰고 있었다.

아버지... ... 그럼, ...”

왜 널 키웠냐고? 착각하지 마라. 처음엔 네가 나일 강에 뿌려진 열 번째 조각이 될 뻔 했으니까. 그래도..”

메마른 한숨이 길었다.

네프티스가 널 원했으니까. 그 뿐이다. 지키지 못 한 내 나름의 속죄였어. 좋은 애비가 되긴 첫 마음부터 글렀던 거지.”

아버

네놈이 지금보다 훨씬 애송이었을 때 분명히 내 길을 따라오지 말라고 한 적이 있을 거다.”

“...”

이제야 돌대가리가 좀 굴러가는 모양이지? 말도 더럽게 안 듣는 아들새끼를 세크메트년의 속삭임을 비집고 약속된 저주의 길에서 쫓아내는 게 어디 쉬웠던 줄 알아? 난 전쟁의 신이지 육아의 신이 아냐.”

폐가 조이는 느낌에 얼굴을 잔뜩 찡그린 아누비스가 겨우내 숨을 뱉었다. 건조하게 이어나가는 목소리가 귀에 닿기 전에 튕겨나갔다. 그는 이제 거의 입이 움직이는 모양을 보고 간신히 이해하고 있었다. 아버지. 잘못했어요. 음성이 나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말해야 했다. 들려줘야만 했다. 잘못했어요 아버지. 제발 용서해주세요.

그럼 이제 꺼져. 청승 떠는 척 하려니 지루해 돌아버리겠다.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 더 이상 네놈한테 할 말은 없어. 야 매새끼! 듣고 있으면 데리고 나가!!”

아버지,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호루스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까?”

여전히 바보 같은 질문을 하는구나. 제 애비랑 똑같은 짓을 하고 있는데, 모를 리가 없지. 썩 꺼져. 더 이상 그 새끼 얘기를 하게 하지 마라.”

오감은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고 오히려 심장은 이전보다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예정하지 않았던 할 일이 명확해졌다. 작별인사 따위는 언제나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누비스는 쉬이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다시 만나게 될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여 달라는 등의 말로 또다시 심기를 거스를 필요는 없었다.

조만간 다시 뵙겠습니다.”

그땐 이 감옥의 밖이 될 것입니다.

 

 

호루스...”

멀찍이 이질적으로 솟은 감옥탑을 응시했다. 절대자만이 접근할 수 있다면 그를 꺾어버리면 된다. 그것만큼이나 단순한 건 존재하지 않았다.

절대 당신 곁에 아버지를 두지 않을 겁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이 광활한 사막을 오롯이 당신에게





아누비스랑 호루스랑 세트 쟁탈전(?) 벌이는 것도 보고 싶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내가 흘릴 눈물은 나일 강을 넘어 멀리 범람하여 풍작을 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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